
군위오씨 유래
1. 吳씨의 역사
오(吳)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일본과 베트남 등 에도 우리 오씨는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ㆍ
기원전 1100년대 주나라 때 오의 초대 제후인 태백이 옿니의 시조이다.
그는 주나라(周)의 시조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중옹(仲雍)과 계력(季歷)의 형이며, 주나라 2대 왕 문 왕이 조카가 된다.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경의 인물로, 왕위계승서열 1위였지만 조카에게 황제의 위를 양보하고 제후의 한 명이 됐다.
현재 시조 사당도 오의수도 였던 장쑤성 쑤저우에있다.
한국은 13~15위 정도로 상위 5개 성씨인 김이박정최 수준은 아니더라도 단일성씨로는 최고를 자랑하는 대성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인구 수가 꾸준히 증가해 지금은 서씨나 권씨보다도 많으며 한씨와 순위를 다투고 있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763,281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2020년 당시 51,069,375명) 중 약 1.49%를 차지하면서 성씨서열 12위를 차지하고 있다ㆍ
중국에서는 10위를 차지하며 2000만 명이 넘는 대성이며, 베트남에서는 약 1.3%의 12위를 차지한다.
한국에서는 순위가 비슷한 신씨나 유씨가 오씨보다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신씨나 유씨가 발음만 같고 한자가 다른 경우가 있어 발음만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면 오씨가 이들 성씨보다 적어 보이기 때문이다.
1. 대한민국(한국)의 오씨 조선성씨통보에 210본까지 기록됐고 동국만성보에 의하면 20여본이 있다고 한다.
오씨대동종친회에 의하면, 가장 먼저 득관한 것은고창 오씨로 기록되어 있다ㆍ
전승에 따르면 한국의 오(吳)씨 주류는 중국 오나라 오태백 황제의 후손으로서 그 시조가 신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사실 백제나 고구려 등 다른계통의 吳씨도 소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런 점은 다른 성씨들도 비슷하다.
사회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해주오씨(462,704명)가 전체 오씨 인구(763,281명)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동복 오씨(72,394명)와 보성 오씨(71,162명)를 포함한 3개 본관이 전체 오씨 인구의 약 80%를ㅇ 차지하고 있는 대성으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함양, 나주, 군위, 고창, 낙안, 장흥, 흥양, 화순, 함평, 울산 등 총 213개 본관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대한민국 오씨는 나라에 공헌한 인물들이 많다. 고려조에는 윤관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한, 당대 최고의 문신으로 우리나라 사돈이라는 낱말의 주인 공인 오연총(중서시랑 평장사)과 문장으로 이름 날린 죽림칠현 오세재,조선조에는 선비 정신으로 추앙받는 병자호란 3학사 오달제(당시 장원급제자)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암행어사 박문수를 키운 분무 1등 공신 오명항(당시 우의정), 조선10대 명재상인 영의정 오윤겸, 임진왜란 당시 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3대 문서로 불리는 국보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 독립운동가로는 오동진, 오세창, 오화영 등이 유명하다.
특히 오씨는 자랑스러운 여성 위인의 역사기록이 많다.
고려 왕건이 나주에서 후 백제와 전쟁 중 목이 말라 한 여인을 발견하고 물을 청하자 바가지에 물을 담고 나뭇잎을 띄어 왕건이 물을 천천히 마시게 했다는 일화와 왕건이 한 눈에 반할 정도로 미모가 출중하기로 유명한 나주귀족 출신 장화왕후 오씨(나주 완사천에 유적지 조성), 임진왜란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을 도와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면서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조선시대 최초 여성 의병장, 한국의 잔다르크 밥할머니 오씨(고양시에 밥할머니 공원 조성), 독립운동가로서는 일제에 맞써 싸운 여성 광복군으로서 광복군 지휘부에 중요 국비 문서 전달 임무를 부여 받고 일제의 검열을 피하고자 수백 페이지의 문서를 단 하루만에 암기하여 무사히 지휘부에 그 내용을 전달하여 광복군의 활약을 도운 오광심이 유명하다.
또한 전국 오씨 문중이 동조동근정신으로 연합해 상계시조단(신라~고려조)인 비사대를 공주에 세워 오씨 문중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념하고 있어 성씨의 위세가 상당하다.
1. 해주 오씨
해주 오씨(대한민국 내 462,704명, 2015년 기준)는 전국구다. 경파(약 40만 명), 향파(약 6만 명) 둘이 합쳐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99명, 무과급제자 269명(중시 등 2번 이상 합격자 횟수까지 따지면 298번), 생진사 326명, 역과 56명, 의과 15명, 음양과 2명, 율과 5명, 주학 2명 등을 배출했다. 인조반정 시기부터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을 시작하여 서인 명문가로서 다수의 정승과 대제학, 판서를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명문가에서조차도 1명 배출하기 어렵다는 대제학을 3명이나 배출해 대제학 명문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사림들은 대제학 1명 배출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 3명 배출과 대등할 정도로 여긴다. 또한 무과급제 298명으로 안동 권씨보다도 많은 무과 인물을 배출해 문무 양반 가문으로 세력을 떨쳤다. 해주 오씨는 다른 소론 집안과 달리 탕평파의 입장을 취해 당파싸움에 거듭되는 환국에도 큰 피해를 면할수 있었다. 정조 이후 서인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 되면서 중앙에서 멀어졌지만 조선 말기에 조선을 이끄는 관료들을 다수 배출했고, 현대에는 오세훈 서울시장, 오세정 전 서울대학교 총장 등 다시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해주 오씨는 중국에서 온 때가 서로 다른 두 갈래로 나뉜다. 서로 다른 집안처럼 보이나 두 집안 모두 중국 오태백 황제의 후손 으로 보고시조 기원은 같다 라고 보는 종친들도 있다.
역사상 향파는 신라 지증왕 때 온 오첨(吳瞻)을, 경파는 고려 성종 때 중국 송나라에서 온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한다.
향파는 오씨삼십세계도(1397)를, 경파는 해주오씨족도를 연원기록으로 한다.
1940년 전후로 공개된 '오씨30세계도' 필사본에 근거하면 해주 오씨 향파의 도시조는 태백왕의 25세손인 오기의 45세손 오첨이다.
지증왕이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내려 경남 함양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을 살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둘째 아들 오응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오씨30세계도' 원본을 근거로 작성된 족보들에는 '오첨은 동방으로 와서 김종지(金宗之)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다.
후한 건우 년간에 오첨은 중국으로 돌아갔다'고만 되어 있는데 필사본에는 함양이라는 지명이 추가되었다. 또한 후한 건우 년간은 서기 947~950년인데 지증왕 원년은 서기 500년으로 시간적인 차이가 크고, 지증왕 원년 동래설을 최초로 오씨 족보에 반영한게 1962년 '오씨대동보'이다.
이후 1969년 '오씨원본'도 '오씨대동보'를 따르고 그후로 대부분의 오씨 족보는 지증왕 원년
(500년) 동래설을 따르나 문제는 시초가 되는 1962년 '오씨대동보'가 '오씨30세계도' 필사본을 근거로 하여 지증왕 원년(500년) 동래설을 기록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오응의 9대손 다련군 오희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했으며,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었으며 장화왕후가 고려 2대 왕 혜종의 모후가 된 건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오응, 오희 등의 존재가 필사본에만 있고 원본에는 안 보인다.
즉, 송은당(松隱堂) 오탁진(吳卓眞)의 기록을 기초로 한 해주 오씨(향파) 정해보(1767년), 보성 오씨 병술보(1766년), 함양 오씨족보서(1689년)에는 원래 없던 부분이다.
또한 지증왕 원년은 경진(庚辰)년인데, 필사본에는 신사(辛巳)년으로 되어있다.
이후 내용은 원본과 필사본들이 같다. 오응의 12대손 오광우가 980년 다시 송나라로 귀국해 그의 현손인 오연총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고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여진을 토벌해 1114년 추충공신에 봉해졌으며, 1116년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이 됐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이 오현보, 오현좌, 오현필이라는 세 아들을 두는데, 이들이 1216년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군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각각ㅡㅡ 해주군, 동복군, 보성군에 봉해져, 해주 오씨 향파, 동복 오씨,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경파들은 해주오씨족도를 따로 쓰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시조인 고려 대학자 오인유는 본래 중국 송나라의 대학사로, 성종은 특별히 고려로 건너온 그를 발탁해 군기감과 예부의 일을 맡겼다. 이에 대해 많은 연구자들은 '송나라 학사인 오인유가 고려로 동도했다'는 동도설의 근거자료인 문양공지석문"에 대해 그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황해도 해주에 정착해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삼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정방(吳定邦)의 정무공파(貞武公派)와 오윤겸(吳允謙)의 추탄파(楸灘派)에
서 특히 많은 인물이 나왔고, 서인이 주동한 인조반정으로 중앙정계에 진출 하면서 세력이 또 다시 크게 늘었다. 오윤겸의 조카가 삼학사로 알려진 오달제(吳達濟)이다. 이후 영조때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1등 분무공신 오명항에 이르기까지 경파 역시 번성을 누렸다.
두 집안은 각 시조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고증하기 어려우므로, 별개의 계통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 뿌리가 중국 오나라 태백 황제로부터 유래되어 현재 두 집안 모두 중국 오씨와 교류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경파 시조단이 있으며 충남 공주에 향파 시조단이 있다. 특히 공주 취리산에는 보성 오씨가 문중의 터를 제공하고 전국 오씨들이 힘을 합쳐 신라 때부터 고려 때까지의 상계 시조단인 비사대를 조성하여 신라 김씨,박씨 등을 제외하면 시조단의 위세가 다른 성씨들에 비해 상당하여 가문의 자랑이며 재실도 재건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후손들에게 대한민국 오씨 가문 자체가 자랑스럽게 여겨지도록 각 문중에서 손잡고 노력하고 있고 그것이 선조님들의 뜻일 것이기에 오씨의 미래는 밝다고 보여진다.
2. 동복 오씨
두 번째로 많은 동복 오씨
(대한민국 내 72,394명, 2015년 기준)는 향파.동복(同福)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을 중심으로 화순군 동북부에 해당하는 옛 고을이나 선조들이 동복 외에도 수도에 터를 잡고 정계진출에 성공하여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정승을 배출 하는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남인 계열 가문으로서 인평대군의 부인인 복천 부부인 오씨와 그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의 권세를 배경으로, 오시수(우의정)을 비롯, 오시복(호조판서), 오정창(예조판서), 오정위(공조판서) 등 숙종 때 중앙정계의 화려한 주류로 위세를 떨쳤으나 경신환국과 갑술환국을 거치며 대거 숙청되면서 짧은 전성기를 마감하였다.
복천 오씨(福川 吳氏)라고도 한다.
3. 보성 오씨
세 번째로 많은 보성 오씨
(대한민국 내 71,162명, 2015년 기준)도 향파 집안이다.
서기 500년 지증왕 때 남제의 사신으로 온 오첨과 그 차남을 시조로 한다.
본은 전라남도 보성군 이지만 집성촌은 대부분 충청도에 위치해있으며, 중시조 오현필의 묘도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제외 하면 특히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7]에 가장 많다.
집성촌은 전라도 2곳, 충청도 10곳이다.
조선개국 1등 공신 오몽을 배출한 집안이나 오몽을이 1차 왕자의 난 때 정안군의 반대파에 섰다가 지면서 공신 작위가 삭탈된다.
보성오씨는 해주오씨, 동복오씨, 보성오씨 시조단인 금양단을 각 문중과 함께 공주 취리산에 모셔 왔는데 신라 오첨공부터 고려조에 이른는 상계 조상들의 비석 을 모시는 터를 제공하여 비사대를 세우는 등 전국 오씨가 연합하는데 일조를 했다. 또한 보성오씨는 청주(옛 청원군 일대)에 오박사 마을(3대가 박사)을 조성하여 마을교육, 인성교육에 앞장서고 있고 오박사 마을은 전국 오씨 문중 모임 때 연수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4. 함양 오씨
네 번째로 많은 함양 오씨
(대한민국 내 35,846명, 2015년 기준)는 향파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에 많고, 동복 및 보성 오씨와는 같은 집안이다.
조선시대 학문으로 유명
했던 덕계 오건 선생이 함양 오씨 출신이며 산청에 덕계선생을 모시는 서원이 있다.
5. 나주 오씨(=금성 오씨)
다섯 번째로 많은 나주 오씨(대한민국 내 32,610명, 2015년 기준)는 고려 건국 당시 국구 오다련을 시조로 하므로 당연히 향파겠지만 지증왕 때의 오첨과 관련성이 있는 직접적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금성 오씨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 장화왕후가 낳은 혜종이 권력 다툼에 패하
면서 집안이 위기에 처한다.
이후 고려조 때는 계속 잠잠하다가 조선 세조 때 오자치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우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킨다.
그의 손자 오겸은 좌찬성까지 올라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한 후 죽었으며, 사후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또한 이때 시점 이후로는 서인 및 노론 계열 가문으로써, 세도 정치 시기 직전까지 전라도 및 한양 정계에서 그 위세를 떨쳤다.
6. 군위 오씨
군위 오씨의 시조는 고려 시대 **호부상서를 지낸 숙귀공(淑貴公)**으로, 제주 입도조 석현공은 숙귀공의 9대손에 해당합니다.
석현공의 선친이신 **진인공(進仁公)**께서는 경북 군위 지역에서 **진무사(鎭撫使, 정3품)**를 지내신 분으로, 조선 전기 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국방 조직의 핵심 인물이셨습니다.
석현공께서는 1420년, 진인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20세 되던 해인 세종 22년에 문과에 급제하셨고, 이후 **통정대부 행 나주영장(정3품)**에 이르러 문무와 지덕을 겸비한 관료로 높은 평가를 받으셨습니다.
군위 오씨의 제주 입도조이신 **석현공(碩賢公)**께서는 조선 전기 나주영장으로 재직하시던 중, 1453년 계유정난과 1455년 단종 폐위라는 격변의 정치 상황을 겪게 됩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되고, 김종서·성삼문·박팽년 등 충신들이 처형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석현공께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충의가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관직에 뜻을 둘 수 없다고 판단하시고, 모든 관직을 버린 채 초야에 묻혀 살겠다는 결심으로 제주로 낙향하시게 되었습니다.
공께서는 1456년, 36세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성산포구로 입도하여
현재의 성산읍 신양리 일대에 정착하셨으며, 이곳에서 지역 주민을
훈학하고 교화하며 제주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석현공 이후 가계는 2대 철순, 3대 세춘, 4대 윤걸로 이어지며 초기에는 성산 일대를 중심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윤걸공께서 네 아들을 두면서, 입도 5세손에 이르러 장파·중파·중말파·말파의 네 계통으로 분파되었고,
이를 계기로 군위 오씨는 제주 전역으로 거주지를 넓혀 나가게 됩니다.
장파는 제주시 아라동을 거쳐 한림읍 명월리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중파는 난산리를 중심으로 위미·하효·토평·구좌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중말파는 가시리를 거쳐 토평으로 옮겨 정착하였고 말파 역시 난산리를 중심으로 의귀·중문·화순·창천·한림·구좌 등지로 주거지를 넓혔습니다.
이처럼 군위 오씨는 특정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제주 각지에 산재
정착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입도 이후 군위 오씨 후손들은 향리, 유학자, 중간 지식층으로 자리 잡으며 중앙 행정 질서와 제주 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이는 제주가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조선의 국가 체제 안에서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데 기여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군위 오씨는 대규모 집성촌보다는 여러 마을에 산재 정착하면서
토착 성씨들과 혼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문중 중심이 아닌 마을 공동체 속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되었습니다.
그 결과 외래 성씨이면서도 제주 사회에 깊이 스며든 **‘제주화된 성씨’**로 기능하며 지역 간 완충과 연결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서당 운영, 향약 참여, 제례와 교육 전통 유지 등을 통해 유교적 질서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마을 운영과 교육의 안정판 역할을 해온 점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요약하자면, 군위 오씨는 제주에서 눈에 띄는 지배층이라기보다
지역사회를 오래 지탱해 온 연결자이자 조정자, 생활 속 지식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고창 오씨
고창 오씨(대한민국 내 16,716명, 2000년 기준)는 향파로(이전 작성자가 고창 오씨가 해주 오씨에서 분파되었다는 오해에서 향파라고 쓴 잘못된 기술이다.
아래 고창 오씨와 헤주오씨 사이의 관련성 검토 글참조),
오첨의 16세손인 한림학사 오학린을 시조로 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다른 관파와 달리, 시조 오학린(吳學麟)이 지은 '중유흥 복사시(重遊興福寺詩)'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 시는 '구룡산 흥복사에서 다시 유람하며'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오학린이 작성한 외교문서『재걸추훼압 강성교궁구장(再乞抽毁鴨江城橋弓口狀)』도 전해진다. 시조의 실제 작품이 현존한다는 점에서 고창오씨 문중의 독특한 문학적 전통을 보여준다. 관향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이다.
초반에는 오인정, 오세문, 오세재 등 학문으로 이름 높은 사람이 많았다.
조선 조에 들어와 죽오 오언의와 그의 손자 죽유 오운은 퇴계 이황, 망우당 곽재우, 학봉 김성일, 내암 정인홍 등 영남의 저명한 인사들과 혼인관계를 통한 폭넓은 인맥을 형성했다. 특히 오운(죽유)의 자식들은 주세붕의 손녀, 김성일의 손녀, 김종직의 현손과 혼인하며 영남 명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1910년 국권상실 후의 독립운동 등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라를 지키기는 데 헌신한 문중 인사들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919년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화영이 있다.
또한 지역 특성상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사람이 많았다.
고창 오씨와 해주 오씨 사이의 관련성 검토[9]
1.1.8. 낙안 오씨 낙안
오씨(대한민국 내9,135명,2000년 기준)는 향파로, 시조는 고려 때 원나라의 일본원정에 김방경의 고려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삼사좌윤을 지내고 낙안군에 책봉된 오사룡(시조 오첨의 32세손)이다.
관향은 전라남도 보성군 낙안면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을 중심으로 하고 순천시 서부 지역과 보성군 벌교읍에 걸친 옛 고을이다.
9. 울산 오씨
울산 오씨(대한민국 내 3,015명, 2015년 기준)는 경파다. 시조 오연지는 해주 오씨(경파)의 시조 오인유의 6세손 오효성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동남 변경을 침범하는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학성군에 봉해졌다. 학성(鶴城)은 지금의 울산
광역시. 1.1.10. 연일오씨(영원 오씨)연일 오씨(대한민국 내 393명, 2000년 기준)도 경파 출신이다.
시조 오연경은 해주 오씨의 시조 오인유의 6세손 오효성의 장남으로, 고려 충선왕 때 연일로 강배되어 세거하였다.
연일(延日)은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연경의 차남은 고려 이조전서 흡이며, 삼남 순은 간의대부를 역임하였다.
흡은 연일 오씨로 세계를 잇고, 순의 아들 오사충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후 평안도 영원에 땅을 받고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그의 직계 후손들은 그들의 집안을 영원 오씨로 칭한다고 한다.
11. 청양 오씨
청양 오씨는 특별 귀화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케냐 출신 마라토너 에루페가 2018년 '오주한'으로 개명하면서 생겨난 본관이다. 대전가정법원 공주지원이 '청양 오씨' 본관을 창설할 것을 허가했다.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10년 주기로 성씨의 본관 현황을 파악하고 있으므로, 가장 최근 통계인 2020년 통계에는 아직 잡히지 않는다.
12. 흥양 오씨
흥양 오씨(대한민국 내 2805명, 2020년 기준)흥양 오씨(興陽吳氏)의 시조(始祖)는 현필(賢弼 : 보성 오씨 시조)의 아들인 오광휘(吳光輝)이다.
오광휘의 아들 오완(吳完)은 1339년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시에 사마시(司馬試)에 발탁,같은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태부(太傅)가 되고 국가에 유공하여 흥양군(興陽君)에 봉(封)해지니 흥양은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
군이다.
그 후 후손들이 오완(完)을 시조로 하고 보성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 본관(本貫)을 흥양(興陽)으로 하여 계세(繼世)하고 있다.


